작성자 | 강태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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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꿈해몽 부탁드립니다 | |||
신천 강씨 제주파 문중에 들여보라는 암시 같습니다.
그곳에 가서 문중 의 이모조모를 알아도 보고 조상님의 뿌리도 찾고 하라는 암시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21) 제주파(濟州派) 신천강씨 제주파는 제주 입도시조(入島始祖)이신 전라감사공(全羅監司公) 휘 강영(康永) 할아버님의 후예들이 제주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면서 일컬어지는 파명 이다. 지금은 감사공의 후손이 많이 번창하여 감사공 휘 강영이 제주에서 낳은 아들 3형제의 호를 따라 경재공파(휘 정 후손), 농헌공파(휘 복 후손), 연당공파(휘 만 후손)으로 나뉘어 부르고 있으며 경재공파는 서귀포시 동지역과남원읍 표선면, 성산읍, 구좌읍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농헌공파는 표선면, 성산읍, 서귀포시 동 지역 등에 거주하고 있고, 연당공파는 제주시와 조천읍, 구좌읍, 애월읍, 한림읍 등에 거주하고 있으며, 전국으로 퍼져 대략 3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도 입도조 이신 강영 할아버님은 호경(虎景) 시조로부터 21세손이며, 조부 서(庶)의 다섯 번째 아들인 윤휘(允暉)의 첫 번째 아들로 장손이다. 신덕 고(高) 황후의 4촌 오빠가 되는 분이기도 하다. 공의 호는 영암(瀛巖)이며, 제주 종친들은 영암 감사공으로 칭한다.(앞으로 이 글에서는 감사 공으로 칭함) 감사공께서는 고려 후기의 명장이며 충신으로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호군으로 경성(지금의 개성)을 수복하는데 세운 공과, 기해 격주 공으로 수복경성일등공신(收復京城一等功臣)으로 서훈 되어 강계만호의 직위를 받았다. 우왕 3년(1377년)에는 홍산(지금의 논산)지역에 외적이 침범함에 조전원수로서 최영 장군 등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시고 왜적을 크게 격파하여 홍산대첩(鴻山大捷)의 영웅으로서 많은 공적이 있어 공신록 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시고 한림원 학사를 지냈으며, 자헌대부의 직위에 올랐고 전라감사를 역임하시면서 절의와 문장이 일세를 떨치셨다. 李太祖에 의해 조선(朝鮮)이 건국된 후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내시던 중, 왕자(王子)의 란(亂)으로 특히 관직에 있던 강씨문중(康氏門中)이 정치적 박해를 당함에, 경성에 큰아들 귀존과 부인의 소식을 모른 채 태종 2년(1402년)에 제주로 들어와서 신천강씨의 입도 시조가 되었고 제주 고씨를 배필로 하여 아들 3형제를 두셨다. 제주에 낙향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후진교육에 힘 기울인 결과, 고려의 유신으로 충절의 귀감이 된 김만희(김해김씨의 제주입도 시조), 이미(경주이씨의 제주입도 시조), 한천(청주한씨의 제주입도 시조) 등과 더불어 제주 4현(濟州四賢)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감사공에 대해서는 제주에서 여러 가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 사실에 대하여 고찰해보기로 한다. 감사공께서 전라감사를 지내시다가 그 시기인 1396년 신덕 고 황후께서 승하하시자 이방원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인 방석과 동생 방번 등을 제거하였고, 1402년에는 신귀, 조사의, 강현 등이 왕자의 난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는 등 정세가 어렵게 돌아갔다. 이때 감사공 께서는 전라감사의 직을 버리고 제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감사공은 제주로 오는 뱃길의 중간쯤에 있는 무인도를 바라보며 이제는 스스로 관직을 내려놓는다는 의미로 관복을 벗었다고 해서 지금도 제주 사람 들은 그 섬 이름을 "관탈섬"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감사공이 제주에 들어올 때 함덕의 포구로 들어왔는데, 그 포구는 강영이 들어온 포구라고 해서 지금도 "강영개"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지금도 감사공에 관한 일화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전라감사 강영 할아버님의 제주에서의 위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감사공의 묘소는 조천읍 조천리 119번지에 위치해 있다. 감사공의 묘소는 황금 닭(鳳凰)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 마을의 지명도 鳳巢洞(봉황이 둥우리)이라고 한다. 감사공의 묘소는 후손에 전해지지 않아 찾지를 못하다가 후손들이 혼신의 노력을 다한 끝에 묘를 찾았는데 기이한 것은 그 묘에서 감사공의 분묘라는 것을 확신 할 수 있는 지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443년(세종 25년) 부터 2년 동안 제주목사로 재직한 기건(奇虔, 호는 靑坡) 목사는 감사공의 분묘에 지석을 새겨서 몰래 묻어두었는데, 후손들이 1937년 3월 3일에 그 지석을 찾아낸 것이다. 그 지석에는 신천강영감사 임인은적어사 유정복만삼자 유충의 청파지(信川康永監司 壬寅隱跡於斯 有禎福萬三子 有忠義靑坡志)라는 24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석을 보고 감사공의 분묘임을 확인한 후손들은 무한한 경외감과 벅찬 환희에 모든 후손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묘를 다듬는 사업을 진행하였고, 2만 2천평의 넓은 묘역에 크고 장엄한 분묘를 만들어서 인근 학교 학생들이 소풍 오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지석을 발견한 매년 3월 3일을 춘계대제일로 정하여 시제를 모시어 오다가 지금은 5월 5일에 제주도 후손 1천 여명이 모여 시제를 봉향하고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감사공의 춘계 대제일 에는 먼저 조천 서원에서 제향을 드리고 이어서 신천강씨 합동위령비 제단에서의 제향을 드리며, 다음에 감사공 묘의 제향, 다음에 감사공의 아드님들인 정 복 만 3위 제단에 제향을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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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815:34 | 조회:4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