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을그림순례/20] 풍수와 생명의 숲…진안 문장산 하초마을



여름장마 예보를 듣고서도 비 오는 날 진안(鎭安)으로 떠난다. 산천초목은 저 비로 더 무성해지고 해갈되어 개울물소리 약동할 것이다.

사계절 중 여름은 사람에 비할 때 청년기로 거침없이 솟구치는 정열과 달음질치는 기상으로 천지에 닿아있다. 푹푹 찌는 폭염이나 천둥번개의 외침, 소낙비의 시원함도 청춘의 심장을 닮았다. 그래서일까, 고속버스가 진안에 이르자 마이산(馬耳山)이 두 귀를 오똑 세워 잿빛 하늘을 찌르고 있다. 솟구친 기상이 마치 불을 토하는 월드컵 붉은 악마의 두 뿔로 연상된다. 감상은 이내 감회로서 점철된다.





진안 터미널에서 정천행 버스로 갈아타자 차안은 빗물로 인해 질퍽하고 탑승객은 모두 중노인 이상이다. 농촌의 현실로 대중교통은 노인들 차지다. 이들마저 외면하면 운수업은 망한다. 젊은 농부들에겐 자가용이 필수가 된 세상이니까.

월평리의 하초 마을을 묻자 여러 할머니들이 손짓하며 기사에게 소리치므로 길손에 대한 친절이 딴의 인정으로 코끝이 찡하다. 비를 맞으며 월평교회 입구에 내리자 마을은 무성한 숲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다만 주변 용담댐 건설로 이주해온 여섯 세대의 신가옥이 숲 앞에 드러날 뿐이다. 교회 앞길로 인삼밭, 양계축사, 작약꽃밭(약제용)을 지나 마침내 숲에 이르자 짙푸른 녹음이 하늘을 덮고 비바람 소리는 숲의 정령를 일깨우는 듯하다.

한참 동안 숲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 목신(木神)은 잎을 흔들며 무어라고 소리치는데 도대체 알아들을 길이 없다. 분명 나뭇잎의 사연은 줄기를 타고 내려와 저들의 뿌리로 전해지건만….





숲에는 돌탑과 거북바위, 선돌(立石)이 살펴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숲 우수상’(2005년) 표석이 서 있다. 마을 인연은 ‘전북 진안과 장수 지역의 마을숲’을 연구하는 이상훈 선생(진안중학교 재직)과의 만남이다. 경북 의성에서 ‘마을 숲의 환경생태학적 해석’ 세미나에 함께 참여한 바 그에게 하초 마을을 소개 받았다.

“마을숲이란 자생하여 이루어진 산림(山林)이나 목재를 이용할 목적으로 단순하게 수림(樹林)과 같은 산야의 일반적인 숲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마을숲은 마을의 역사, 문화, 신앙 등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마을사람들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는 숲으로서,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보호 또는 유지되어 온 숲을 말한다”(<마을 숲> 16쪽, 김학범, 장동수, 열화당)

이 ‘생명의 숲’은 대부분 풍수적으로 허(虛)함을 방비하기 위해 심었다고 전해온다. 즉 비보수, 수구막이, 숲맥이, 숲정이 숲으로 부르는 까닭이다. 이후 마을숲을 오랫동안 보호 보존하기 위하여 여기에 신성성, 신앙심이 첨가 되었다. 즉 돌탑과 선돌을 세우고 당산나무를 지정하여 숲속에서 제사를 지내는 공동체 의식이 싹터온 것이다.

먼저 마을 입구 첫집의 이장 부부(임종우 65, 김순자 61)를 만나자 어린 외손자와 살고 있다. 넓고 천장이 높은 집은 손수 목수들과 함께 지었다는데 인근 마을(정천면 갈룡리)에서 용담댐 건설로 이주해온 지 6년째다. 나주임씨 절도공파(節度公波) 29세손인 그는 집안 계보와 수몰 직전의 고향마을(갈룡리) 사진을 벽면에 크게 걸어놓았다.







환경운동가 김재일 선생(두레생태기행 회장)은 당시 용담댐 마을에 와서 삶의 터전이 수몰된 환경의 아픔을 되뇌었다.

‘…대대손손 이 밭 기슭에서 살아온 이들은 지금 어디로 떠났는지, 제대로 보상이나 받고 떠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봄날 강변에 파랗게 쌓이던 물소리 값이며, 여름날 대청에서 앉아듣는 매미소리 값이며, 가을날 물위에 동동 떠내려가던 붉은 단풍잎 값이며, 겨울날 눈밭을 가로질러 가던 고라니의 발자국 값은 받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른 아침 바짓가랑이를 상큼하게 적셔주던 남새밭의 이슬 값이며, 냇물 위로 수없이 쏟아지던 햇살 값이며, 강물 위로 그림자 지던 붉은 노을 값이며, 뒷동산 참나무숲에 걸려있던 달빛 값은 제대로 쳐서 받으셨는지.

아아, 용담댐에 숨 막히게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다.‘(김재일의 <생명산필> 114쪽)






결국 고향을 지천에 두고 싶어 멀리 떠나지 못한 임씨는 사진을 가리키며 미꾸라지, 우렁, 메기, 뱀장어 잡던 추억이 아직도 새록하다고 눈시울을 붉힌다. 수몰 가옥 중 여섯 가구가 이주해 하초 마을 입구에 목조 기와집과 양옥으로 지었는데 돌아보니 의외로 크고 모두 튼실하다.

마을길을 따라 마을회관으로 가던 중 전기주씨(전 이장)를 만나니 그이는 ‘아름다운 숲’ 수상에 직접 관여한 인물이다. 이 하초 숲 마을은 조선 중엽에 도선국사가 마을 뒷산을 보고 마치 말이 풀을 뜯는 형국과 같다고 하여 지역에 따라 상초(上草), 중초(中草), 하초(下草)로 불렀다고 한다. 현재 중초마을은 없어지고 상, 하초 마을만 남았다.

그 중 하초 숲은 ‘새내 숲’ 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일제 때 일본경찰이 진안 일대를 다 뒤지고 다녔는데 숲으로 가려진 마을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숲의 나무가 너무 크고 좋아 목재로 베어 썼더니 연이어 마을에 불이 났으므로 다시 마을숲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비가 그친 탓에 마을을 둘러보려 배낭을 푼 마을회관을 나서자 거대한 느티나무가 마을의 중심으로 당당하고 거침없이 푸르다. 산길로 마을 뒷산에 올라 지형을 살펴보니 길 옆 수로와 산 밑 물길이 내려가 마을 입구 숲(하초숲)에서 만나 들판으로 빠지는 형국이다. 높지 않은 야산이 둥지처럼 둘렀는데, 좌청룡의 용맥이 멈춘 곳에 마을회관이 자리 잡았다.

주산(主山)인 뒷산이 포근해서일까. 안산(安山)은 마을숲이 대신하였고, 들판 너머 아스라이 보이는 조산(朝山)은 문장산에서 흘러내린 옥녀봉쯤으로 여겨진다. 직접 마을과는 영향이 없다하나 맑은 날이나 숲이 지고 나면 사람들은 마을에서 뾰죽한 옥녀봉을 바라보며 산다고 하였으니.

풍수가 최창조 선생은 수 년 전 이곳에 와서 느낀 점을 큰 행운으로 피력하였다.

‘정천면 월평리 하초 마을. 나지막한 산자락에 기대고 있는 우리들 보모님 같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 공간 구조를 살피며 나는 우리의 부모님들이 얼마나 편안하고 안온하며 지혜롭게 터전을 잡고 있는지를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을의 뒤와 양 옆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장풍의 형세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쪽이 문제였다. 가려주는 둔덕이 전혀 없어 허전한 분위기를 마을 전체에 밀어 넣고 있는 형세였다. 이런 경우는 문제다. 안산이 없고 조산이 시원치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비보책이 몇 가지 있었는데, 저자는 이것이 우리 풍수의 한 커다란 특징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우선은 바로 그 허전한 마을 앞쪽에 숲을 조성하였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동수(洞藪)라고 부른다. 동수는 원래 풍수에서 수구(水口)의 허결을 방비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다…(중략)…우리 조상들은 그저 풍수와 지리가 완벽한 자리를 찾아내는 술법에만 탐닉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당의 조건이 부족한 터들을 인공적으로 보충함으로써 제대로 된 삶터를 가꾸고자 노력했던 셈이다. 이 점 풍수는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보신책 수준의 지리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대동적인 삶터 추구의 지리학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할 것이다(‘조화로운 삶터, 진안의 마을 풍수’, <진안문화> 2001, 진안문화원)






최 선생은 덧붙여서 동수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어 사람들이 숲 아래에 조산(造山)인 돌탑을 쌓았고 또 선돌(立石)도 세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숲문화는 마을 공동체 행사로 실제 이어지고 있는데, 당산제(정월 초사흘), 고목제(정월 초이렛날), 산신제, 기우제, 농신제가 그것이다.

뒷산의 숲이 우거진 관계로 마을 전경을 담기가 녹록치 않아 겨우 화첩에 붓을 떼고 다시 마을 입구 숲으로 간다. 이 하초 숲은 특별한 관리를 받고 있는데 활엽수종이 거반이다(느티나무 92, 상수리나무 43, 리기다소나무 33, 떡갈나무 5그루 ; 박재철, 이상훈 2002년 조사 ‘진안마을 숲 복원 매뉴얼’).

다시 숲에서 서성이니 돌탑 4기와 선돌 2기, 당산나무, 그리고 거북바위가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현재 마을 입구의 숲길이 아닌 옛 도로에 위치한 2기의 선돌과 거북바위의 사연은 이채롭다.

선돌이 비보적 기능을 가진 입석이라면 거북돌은 풍요의 상징이다. 머리 방향이 상초 마을(바깥)로 향해 있어 바깥 마을의 재물을 먹고 똥을 싸면 하초 마을이 부유해 진다는 속설이다. 즉 거북이는 알을 낳음으로 다산과 재물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탓에 앞마을과 실랑이로 갈등을 빚기도 했단다. 새끼줄에 둘린 거북바위와 선돌 아래 빗물이 고인 2개의 사발, 그 그릇엔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있다.

그런데 이 숲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누리는 사람은 숲가에 집을 지은 건축가 유양수씨(54)다. 진안이 고향인 그는 10년 전(1996년) 낙향하여 이곳에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 전원주택의 모델로 자신의 집을 패널식 스틸로 지었는데 내부를 살펴보니 높은 지붕과 탁 트인 시야로 창을 냈다. 업무상 ‘옛시골개발상담실’을 겸한 곳이다.

현관 정면으로 앞산과 골짜기, 들판이 드러나는가 하면 측면으로는 하초 숲을 품었다. 실용적인 내부공간과 손님을 위한 방, 그리고 무엇보다 맞벌이 하는 아내가 설거지를 하면서 피로하지 않게 숲으로 창을 내준 것이다. 그랬더니 아내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더라는 대목이 참 부러웠다. 그 순간 길손은 초라해지고 말았지만. 잘 가꾼 뜨락은 매일 흙장갑을 낀다는 그의 성실함으로 유지되고, 자신에게 숲은 행운이지만 마을분들께 늘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산다고 했다.

한편 유씨에 의하면 하초숲은 사계절의 변화로 언제나 설레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된다고 한다. 그 중 가을날의 낙엽 지는 광경은 비 오듯 다양한 갈색 잎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장관으로 가슴을 울렁이고, 겨울나무의 눈꽃, 즉 잔가지에 내린 눈이 얼어서 수정처럼 빛날 때를 내내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 숲의 고마움을 되돌리기 위해 하초 마을회관을 손수 그가 설계하고 지었다.

하룻밤을 홀로 그 마을회관에서 보내며 또 빗소리를 듣는 시간. 이 땅을 살다간 영혼들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왁자지껄한 주민들 웃음소리가 오버랩된다. 한겨울엔 회관에 모여서 밤을 새우지만 여름엔 바빠 들락거리지 않아서일까. 둘러보니 관리가 아쉬운 형편이다.

이튿날 아침 외벽의 창이 많아 잠을 떨치고 일어나자 햇살이 눈부시다. 비구름이 물러가고 맑게 갠 청명한 날씨다. 또 한 끼를 이장댁에서 신세지고 돌아오니 사람들이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에 모여 있다. 여름엔 회관보다는 역시 느티나무 그늘이 제격이다.

마을의 유래는 정확치 않다. 맨 처음 오씨가 거주했다고 전하나 지금은 각성받이(김, 박, 최, 정, 이, 임씨)가 되었고, 현재는 25호 가옥에 60여 명이 살고 있다.

수령 250년의 노거수(느티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모인 사람들. 지팡이에 의지한 김상수 할아버지(79·마을 노인회장), 부인 김정순 할머니(73)는 무려 11자녀를 두었다니 숲속 거북이의 영험인가. 아직 건강하고 의욕도 좋으시다. 최분순 할머니(78)는 손자를 업고 달래는데 이순이 할머니(85)의 백발과 깊은 주름은 신산한 삶의 나이테를 보여준다. 한편 마을 입구에서 토종닭을 치는 박대운 새마을지도자(61)는 5대째 거주한다고 하니 조상의 은덕이 저 산과 들, 바람과 물속에 흔연히 배어있겠다.

이제 화첩을 들고 다시 한번 산길을 오르는데 한옥처마 밑에 즐비한 제비 문양이 눈에 띈다. 강창희-김용순씨의 집에 나는 제비 형상이 오려 붙여져 있다. 마을의 둥지를 떠난 제비가 그리워서일까. 왠지 뭉클한 감회인데 김씨는 훗날 손자가 집에 놀러오면 옛날 얘기와 함께 제비의 추억을 전해주기 위함이란다.

둥지를 버리고 떠난 제비들처럼 마을을 떠난 사람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예부터 우리 마을은 숲에서부터 춤을 추고 들어오는 형국이라우.”

하지만 마을 어른들의 자긍이 다만 전설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풍수의 명당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공동체 문화의 삶이 현실에 맞게 살아나야하고, 숲의 고마움도 살필 줄 아는 자만이 주인공이다. 즉 허한 터전을 보완한 선조들의 지혜처럼 현실의 어려움을 극기하는 열정이 요청된다. 따라서 마을의 주인들이 모쪼록 청안(淸安)하고 생명의 숲이 더욱 사랑받는 일이 마을의 미래요, 희망이다.

글·그림=이호신 한국화가 lhs1957@lycos.co.kr

[출처] 풍수와 생명의 숲…진안 문장산 하초마을|작성자 필소굿